6. 피신과 유랑의 세월 ①
나는 이로부터 잠깐동안 가흥에 몸을 붙이게 되었다. 성은 조모님을 따라 장이라 하고 이름은 진구, 또는 진이라고 행세하였다. 가흥은 내가 의탁하여 있는 저보성씨의 고향인데, 저씨는 일찍 강소성장을 지낸 이로 덕망이 높은 신사요, 그 맏아들 봉장을 미국 유학생으로 그곳 동문 밖 민풍지창이라는 종이 공장의 기사장이었다. 저씨의 집은 가흥 남문 밖에 있는데 구식 집으로 그리 굉장하지는 아니하나 대부의 저택으로 보였다. 저씨는 그의 수양아들인 진동손 군의 정자를 내 숙소로 지정하였는데 이것은 호숫가에 반은 서양식으로 지은 말쑥한 집이었다. 방직공장인 수륜사창이 바라보이고 경치가 좋았다. 저씨 댁에 내 본색을 아는 이는 저씨 내외와 그 아들 내외와 진동손 내외뿐인데 가장 곤란한 것은 내가 중국 말이 융통하지 못함이었다. 비록 광동인이라고 행세는 하지마는 이렇게도 말을 모르는 광동인이 어디 있으랴. 가흥에는 산은 없으나 호수와 운하가 낙지발같이 사통팔달하여서 7, 8세 되는 아이들도 배를 저을 줄을 알았다. 토지는 극히 비옥하여 물산이 풍부하고 인심은 상해와는 딴판으로 순후하여 상점에 에누리가 없고 고객이 물건을 잊고 가면 잘 두었다가 주었다.
나는 진씨 내외와 동반하여 남호에 있는 연우루와 서문 밖 삼탑 등을 구경하였다. 여기는 명나라 때에 왜구가 침입하여 횡포하던 유적이 있었다. 동문 밖으로 10리 쯤 나아가면 한나라 적 주매신의 무덤이 있고 북문 밖 낙범정은 주매신이 글을 읽다가 나락 멍석을 떠내려 보내고 아내 최씨에게 소박을 받은 유적이라고 한다. 나중에 주매신이 회계태수로 부임하여 올 때에 최씨는 엎지른 동이의 물을 주워담지 못하여 낙범정 밑에서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가흥에 얹혀산 지 얼마 아니하여 상해 일본 영사관에 있는 일본인 관리 중에 우리의 손에 매수된 자로부터, 호항선(상해, 항주 철도)을 수색하러 일본 경관이 가니 조심하라는 기별이 왔다. 가흥 정거장에 사람을 보내어 알아 보았더니 과연 변장한 일본 경관이 내려서 여기저기 둘러보고 갔다고 하므로 저 봉장의 처가인 주씨 댁 산정으로 가기로 하였다. 주씨는 저 봉장 씨의 후처로 첫아기를 낳은 지 얼마 아니되는 젊고 아름다운 부인이었다. 저씨는 이러한 그 부인을 단독으로 내 동행을 삼아서 기선으로 하룻길 되는 해염현성 주씨 댁으로 나를 보내었다.
주씨 댁은 성내에서 제일 큰 집이라 하는데 과연 굉장하였다. 내 숙소인 양옥은 그 집 후원에 있는데, 대문 밖은 돌을 깔아 놓은 길이요, 길 건너는 대소 선박이 내왕하는 호수다. 그리고 대문 안은 정원이요, 한 협문을 들어가면 사무실이 있는데 여기는 주씨 댁 총경리가 매일 이집 살림살이를 맡아 보는 곳이다. 예전에는 4백여 명 식구가 한 식당에 모여서 식사를 했으나 지금은 사농공상의 직업을 따라서 대부분이 각처로 분산하고 남아 있는 식구들도 소가족으로 자취를 원하므로 사무실에서는 물자만 배급한다고 한다.
집의 생김은 벌의 집과 같아서 세 채나 네 채가 한 가족 차지가 되었는데 앞에는 큰 객청이 있고 뒤에는 양옥과 화원이 있고 또 그 뒤에는 운동장이 있다. 해염에 대화원 셋이 있는데 전가 화원이 첫째요, 주가 화원이 둘째라 하기로 전가 화원도 구경하였다. 과연 전씨 댁이 화원으로는 주씨 것보다 컸으나 집과 설비로는 주씨 것이 전씨 것보다 나았다.
해염 주씨 댁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이튿날 다시 주씨 부인과 함께 기차로 노리언까지 가서 거기서부터는 서남으로 산길 5,6리를 걸어 올라갔다. 저 부인이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연방 손수건으로 땀을 씻으며 7, 8월 염천에 고개를 걸어 넘는 광경을 영화로 찍어 만대 후손에게 전할 마음이 간절하였다. 부인의 친정 시비 하나가 내가 먹을 것과 기타 일용품을 들고 우리를 따랐다. 국가가 독립이 된다면 저 부인의 정성과 친절을 내 자손이나 우리 동포가 누구든 감사하지 아니하랴. 영화로는 못 찍어도 글로라도 전하려고 이것을 쓰는 바이다.
고개턱에 오르니 주씨가 지은 한 정자가 있다. 거기서 잠시 쉬고 다시 걸어 수백 보를 내려가니 산 중턱에 단정한 양옥 한 채가 있다. 집을 수호하는 비복들이 나와서 공손하게 저 부인을 맞는다. 부인은 시비에게 들려 가지고 온 고기와 과일을 꺼내어 비복들에게 주며 내 식성과 어떻게 요리할 것을 설명하고, 또 나를 안내하여 어디를 가거든 얼마, 어디 어딘 얼마를 받으라고 안내 요금까지 자상하게 분별하여 놓고 당일로 해염 친가로 돌아갔다.
나는 이때부터 매일 산에 오르기로 일을 삼았다. 나는 상해에 온 지 14년이 되어 남들이 다 보고 말하는 소주니 항주니 남경이니 하는 데를 구경하기는 고사하고, 상해 테두리 밖에 한 걸음을 내어 놓은 일도 없었다. 그러다가 마음대로 산과 물을 즐길 기회를 얻으니 유쾌하기 짝이 없었다.
이 집은 본래 저 부인의 친정 숙부의 여름 별장이러니, 그가 별세하매 이 집 가까이 매장한 뒤로는 이 집은 그 묘소의 묘막과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마련한 제각을 겸한 것이라고 한다. 명가가 산장을 지을 만한 곳이라 풍경이 자못 아름다웠다. 산에 오르면 앞으로는 바다요, 좌우는 푸른 솔, 붉은 가을 잎이었다.
하루는 응과정에를 올랐다. 거기는 예전에 지은 승방이 있어, 한 늙은 여승이 나와 맞았다. 그는 말끝마다 나무아미타불을 불렀다. "원로 잘 오셔 계시오. 아미타불, 내 불당으로 들어오시오. 아미타불!" 이 모양이었다. 그를 따라 암자로 들어가니 방방이 얼굴 희고 입술 붉은 젊은 여승이 승복을 맵시있게 입고 목에는 긴 염주, 손에는 단주를 들고 저두추파로 인사를 하였다. 암자 뒤에 바위 하나가 있는데 그 위에 지남철을 놓으면 거꾸로 북을 가리킨다 하기로 내 시계에 달린 나침반을 놓아 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아마 자철광 관련된 것인가 하였다.
하루는 해변 어느 진에 장구경을 갔다가 경찰의 눈에 걸려서 마침내 정체가 이 지방 경찰에 알려지게 되었으므로 안전치 못하다 하여 도로 가흥으로 돌아왔다.
가흥에 와서는 거의 매일 배를 타고 호수에 뜨거나 운하로 오르내리고 혹은 엄가빈이라는 농촌의 농가에 몸을 붙여 있기도 하였다. 이렇게 강남의 농촌을 보니 누에를 쳐서 길쌈을 하는 법이나 벼농사를 짓는 법이나 다 우리 나라보다는 발달된 것이 부러웠다. 구미 문명이 들어와서 그런 것 외에 예전의 것도 그러하였다.
나는 생각하였다. 우리 선인들은 한, 당, 송, 원, 명, 청 시대에 끊임이 없이 사절이 내왕하면서 왜 이 나라의 좋은 것은 못 배워 오고 궂은 것만 들여왔는고. 의관과 문물들을 중국의 실물을 쫓는다는 것이 조선 오백 년의 정책이라 하면서, 머리 아픈 망건이나 망하기 좋은 다른 것들 뿐이요, 실제 생활에 이로운 것에 관한 것은 없었다. 우리 민족의 머리에 들어박힌 것은 원수같이 사대하는 사상뿐이 아닌가. 주자학을 주자 이상으로 발달시킨 결과는 두손 맞잡고 예만 차리면서 손가락 하나 안 움직이고 입만 나불되게 하였다. 결국 민족의 원기를 소진하게 되니, 남는 것은 편협한 당파싸움과 남에게 기대려는 마음 뿐이다.
오늘날을 보아도 요새 일부 청년들이 제정신을 잃고 있다. 러시아를 조국으로 삼고 레닌을 국부로 삼아서 어제까지의 민족혁명은 두 번 피흘릴 운동이니 사회주의 혁명을 해야 한다고 떠들던 자들이, 레닌의 말 한마디에 돌연히 민족혁명이야말로 그들의 목적인 것처럼 들고 나오지 않는가. 주자님의 방구까지 향기롭게 여기던 학자 부류들처럼 레닌의 똥까지 달다고 하는 청년들을 보게 되니 한심한 일이다.
나는 반드시 주자를 옳다고도 아니하고 마르크스를 그르다고도 아니한다. 내가 청년 제군에게 바라는 것은 자기 중심을 잃지 말라는 말이다. 우리의 역사적 이상, 우리의 민족성, 우리의 환경에 맞는 나라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밤낮 자신을 잃고 남만 높여 남의 발 뒷꿈치를 따르면서 장한 척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제 머리로, 제 정신으로 생각하라는 말이다.
나는 엄가빈에서 사회교 엄항섭 군 집으로, 다시 오룡료 진동생의 집으로 옮아 다니며 숙식하고 낮에는 주애보라는 여자가 사공이 되어 부리는 배를 타고 이 운하 저 운하로 농촌 구경을 돌아 다니는 것이 나의 일과였다. 가흥 성내에 있는 진명사는 유명한 도주공의 집터라 한다. 그 속에는 암소 다섯 마리를 기르는 축오자와 또 양어장을 하던 연못이 있고 절문 밖에는 도주공유지라는 돌비가 있다.
하루는 길로 돌아다니다가 큰 길가 마당에서 군사를 조련하는 것을 사람들이 보고 있었다. 나도 그 틈에 끼었더니 군관 하나가 나를 유심히 보며 내 앞으로 와서 누구냐 하기로 나는 언제나 하는 대로 광동인이라고 대답하였다. 이 군관이 정작 광동인인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금방 가짜라는 것이 탄로나서 보안대 본부로 붙들려 갔다.
다행히 저씨 댁과 진씨 댁에서 힘써준 결과로 무사하게는 되었으나 저봉장 군은 내가 피신할 줄을 모른다고 질책했다. 그리고는 그의 친우이자 중학교 교원인 과부가 하나 있으니 그와 혼인하여 살면서 행색을 감추라고 권하였다. 나는 그런 유식한 여자와 같이 살면 더욱 내 본색이 탄로되기 쉬우니 차라리 무식한 뱃사공 주애보에게 몸을 의탁하겠다 하고, 아예 배 안에서 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서 오늘은 남문 밖 호수가에서 자고 내일을 북문 밖 운하 옆에서 자고 낮에는 육지에 나와 다녔다.
이러는 동안에도 박남파, 엄일파, 안신암 세 사람은 줄곧 외교 정보와 수집에 종사하였다. 중국인 친구의 도움과 미주 동포의 후원으로 활동하는 비용에는 곤란이 없었다.
박남파가 중국 국민당 당원이던 관계로 당의 조직부장이자 강소성 주석인 진과부와 면식이 있었는데, 그의 소개로 장개석 장군이 내게 면회를 청한다는 통지를 받고 나는 안공근, 엄항섭 두 사람을 대동하고 남경으로 갔다. 공패성, 소쟁 등 요인들이 진 과부 씨를 대표하여 우리 일행을 맞이하여 중앙반점에 숙소를 정하였다.
이튿날 밤에 중앙군관학교 구내에 있는 장개석 장군의 자택으로 진 과부 씨의 자동차를 타고 박남파 군을 통역으로 데리고 갔다. 중국 옷을 입은 장씨는 온화한 낯빛으로 우리를 대접하여 주었다. 인사가 끝난 뒤에 장 주석은 간명한 어조로, "동방의 각 민족들은 손중산 선생의 민족, 민권, 민생의 삼민주의에 부합하는 민주정치를 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라고 하기로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며, "일본의 대륙 침략의 마수가 시시각각 중국에 침입하니 좌우를 물리시면 필담으로 몇 마디를 하겠소." 하였다.
장개석은 "하오하오."하며 좋다하므로 진 과부와 박남파는 밖으로 나갔다. 나는 붓을 들어, "선생이 백만 금을 지원하시면 2년안에 일본, 조선, 만주 세 방면에 폭풍을 일으켜 일본의 대륙침략의 다리를 끊을 터이니 어떻게 생각하오." 하고 써서 보였다.
그것을 보더니 이번에는 장씨가 붓을 들어 썼다. "계획서를 자세히 적어 주시오"
이튿날 간단한 계획서를 만들어 장 주석에게 주었더니 진 과부 씨가 자기의 별장에 나를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고 장 주석의 뜻을 대신 내게 전한다. 특무공작으로는 천황을 죽이면 천황이 또 있고 대장을 죽이면 대장이 또 있으니 장래의 독립전쟁을 위하여 무관을 양성함이 어떠한가 하기로 나는 이야말로 먼저 청하지는 못했지만 바라던 바라 하였다.
이리하여 하남성 낙양의 군관학교 분교를 우리 동포의 무관양성소로 삼기로 계획하였다. 제1차로 북평, 천진, 상해, 남경 등지에서 백여 명의 청년을 모집하여 학적에 올리고, 만주로부터 이청천과 이범석을 청하여 교관과 장교가 되게 하였다. 그러나 이 군관학교는 겨우 제 1기생을 끝으로 일본 영사의 항의로 남경정부에서 폐쇄령이 내려진다.
어찌했든 이때에 대일전선 통일동맹이란 것이 발동하여 다시 통일론이 일어났다. 김원봉이 내게 특별히 만나기를 청하기로 어느 날 진해에서 비밀리에 만났다. 그는 자기가 통일운동에 참가하겠으니즉 나더러도 참가하라는 것이었다. 그가 이 운동에 참가하는 동기는 통일이 목적인 것보다도 중국인에게 김원봉은 공산당이라는 혐의를 면하기 위함이라 하였다. 나는 통일은 좋으나 그렇게 한 이불 속에서 다른 꿈을 꾸려는 통일 운동에는 참가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얼마 후에 소위 5당 통일회의라는 것이 개최되어 의열단, 신한 독립당, 조선 혁명당, 한국 독립당, 미주 대한인 독립단이 통일하여 조선민족 혁명당이 되어 나왔다. 이 통일에 주동자가 된 김원봉, 김두봉 등 의열단은 임시정부를 눈에 든 가시와 같이 싫어하는 무리들이었다. 그래서 임시정부의 해소를 극렬히 주장하였다.
당시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이던 김규식, 조소앙, 최동오, 송병조, 차이석, 양기탁, 유동열 일곱 사람 중에 차이석, 송병조 두 사람을 빼고는 다섯 사람 모두가 통일이란 말에 취해서 임시정부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김두봉은 좋다하고 임시정부 소재지인 항주로 가서 차이석, 송병조 두 사람에게 5당이 통일된 이 날에 이름만 남은 임시정부는 해체해 버리자고 강경하게 주장하였다. 그럼에도 송병조, 차이석 두사람은 굳건히 반대하고 임시정부의 문패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일곱 사람에서 다섯이 빠졌으니 국무회의조차 열 수 없어서 사실상 무정부 상태였다.
조완구 형이 편지로 내게 이런 사정을 전하였으므로 나는 분개하여 즉시 항주로 달려갔다. 이때에 김철은 벌써 작고하여 없고 5당 통일에 참가하였던 조소앙은 벌써 거기서 탈퇴하고 없었다.
나는 이시영, 조완구, 김붕준, 양소벽, 송병조, 차이석 제씨와 임시정부 유지 문제를 협의한 결과 유지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일치했다. 일동 모두는 가흥으로 가서 거기 있던 이동녕, 안공근, 안경근, 엄항섭 등을 추가하여 남호의 놀잇배 한 척을 얻어 타고 호수 위에서 의회를 열었다. 그곳에서 국무위원 세 사람을 더 뽑으니 이동녕, 조완구, 그리고 나 김구였다. 이에 송병조와 차이석을 합하여 국무위원이 다섯 사람이 되었으니 이제는 국무회의를 진행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5당 통일론이 일어났을 때에도 여러 동지들은 별도의 단체를 조직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나는 차마 다시 단체를 하나 만들어 쟁론이 커지기를 원치 아니한다는 이유로 줄곧 반대하여 왔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를 유지하려면 그 배경이 될 단체가 필요하였고, 또 조소앙이 벌써 한국 독립당을 재건했다. 그래서 내가 새 단체를 재건하더라도 통일 파괴자라는 책임은 지지 않을 것이라 동지들의 찬동을 얻어 대한 국민당을 조직하였다.
나는 다시 남경으로 돌아왔으나 왜놈들은 내가 남경에 있는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상해에서는 중국 관원들에게 나를 체포할 것을 요구하는 한편, 암살대를 보내어 내 생명을 엿보고 있었다. 남경 경비사령관 곡정륜은 나를 대면하여 말하기를, 일본측에서 대역죄인인 김구를 체포할 것이니 다른 이유로 방해 말라 하였단다. 그러면서 곡정륜은 도리어 일본측에 자기가 김구를 잡거든 일본서 걸어 놓은 상금은 자기에게 달라고 대답하였다며, 나에게 조심하라고 일러주었다. 그리고 사복 입은 일본 경관들 일곱 명이 부자묘 부근으로 돌아다니더라는 말도 해주었다.
이에 나는 남경에서도 내 신변의 위험함을 깨닫고 회청교에 집 하나를 얻고 가흥에서 배 저어주던 주애보의 본가에 매달 삯으로 15원씩 주기로 하고 그녀를 데려와 동거를 시작했다. 직업은 고물상이요, 출신은 멀찍이 광동성 해남도라 행세했다. 혹시 경관이 호구조사를 오더라도 주애보가 나서서 설명하였기 때문에 내가 나서서 본색이 탄로날 일은 없었다.
노구교 사건이 일어나자 중국은 일본에 대하여 항전을 개시하였다. 이에 객지에 머무는 한국인들의 인심도 매우 불안하게 되어서 5당이 통일로 되었던 민족혁명당이 쪽쪽이 분열되어 조선혁명당이 새로 생겼다. 미주대한독립단은 탈퇴하고 근본 의열단 분자만이 민족혁명당의 이름을 차지게 되었으니, 이렇게 분열된 원인은 의열단 분자들이 민족운동의 가면을 쓰고 속으로는 공산주의를 실행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민족혁명당이 분열된 반면에 민족주의자의 결합이 생겼는데, 곧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단과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모든 애국단체들이 연결하여 임시정부를 지지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임시정부는 점점 힘을 얻게 되었다.
중일전쟁은 강남에까지 미쳐서 상해의 전투가 나날이 중국에 불리하였다. 일본 공군의 남경 폭격도 갈수록 심화되어서, 내가 머물고 있던 회청교의 집도 폭격에 무너져내렸다. 나와 주애보는 간신히 죽기를 면했지만, 이웃에는 시체가 수두룩하였다. 나와보니 남경 각처에는 불이 일어나서 밤하늘은 붉은 양탄자 같았다. 날이 밝기를 기다려 무너진 집과 흩어진 시체 사이를 지나서, 마로가에 어머니가 계신 집을 찾아 갔다. 어머니가 친히 문을 열고 나오시는데, 놀라셨겠다는 나의 말에 어머니는 "놀라기는 무얼 놀라. 침대가 들썩들썩하드군."하시고는 "우리 사람들은 상하지 않았나?" 하고 물으셨다. 나는 그 길로 동포들이 사는 데를 돌아보았으나 남기가에 살고 있던 많은 학생들도 다 무고하였다.
남경의 정세가 위험하여 정부 각 기관도 중경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 광복전선 삼당의 백여 명 대가족은 물가가 싼 장사로 피난하기로 정하고, 상해와 행주에 있는 동지들에게 남경에 모이라는 지시를 하였다. 율양 고당암에서 도가의 공부를 하고 있던 양기탁에게도 같은 기별을 하였다. 그리고 안공근을 상해로 보내어 가족을 데려오되 그의 맏 형수이자 안중근 의사의 부인을 꼭 모셔 오라고 신신당부하였다. 그런데 안공근이 돌아올 때에 보니 제 가족들 뿐이요 안중근 의사의 부인이 없으므로 나는 크게 책망하였다.
양반의 집에 불이 나면 위패부터 먼저 안아 뫼시는 법이거늘 혁명가가 피난을 하면서 나라 위하여 몸을 버린 의사의 부인을 적진가운데 버리고 가는 법이 어디 있는가! 이는 다만 안공근 한 집의 잘못만이 아니라 혁명가의 도덕에 어그러지고 우리 민족의 수치라고 하였다. 질책을 듣고난 안공근은 피난하는 동포들의 단체에 들기를 원치 아니하므로 제 뜻에 맡겨 버렸다.
나는 안휘의 둔계 중학교에 재학 중인 신아를 불러온 후에, 어머니를 모시고 영국배 윤선을 타고 한구로 향했다. 그리고 백여 명의 대가족은 중국 목선 두 척에 짐보따리까지 잔뜩 싣고 남경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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